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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594호 2018년 5월 14일

국어와 영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판문점 선언문''에서 보이는 북한말투


'판문점 선언' 전문(前文)에는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과감하게 일어나가며…'란 대목이 나온다. 골자만 추리면 '시대를 일어나가다'이다. 이 부분은 금세 그리고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4월27일 남북한 분단의 현장에서 울려 퍼진 ‘판문점 선언’의 여운이 이어지고 있다. ‘열려라! 우리말’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그 정치적 의미에 있지 않다. 선언문 곳곳에서 발견되는 ‘북한말투’가 관심사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으나 남북한 간 선언문을 조율하면서 그리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도 이런 경우 자구 하나라도 꼼꼼히 따지는 것이 상례일진대 북한말투가 걸러지지 않은 채 우리에게 공개된 것은 좀 의아스러운 일이다.

‘일어나가며’는 ‘일궈 나가며’란 뜻

남북이 갈라진 지 70년이 흐르면서 말글이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물론 북한말투라고 해도 뜻만 통하면 되지 무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데가 여러 곳 있다. 같은 우리말을 쓰면서도 표현이 어색한 것도 어찌할 수가 없다. 선언문에 투영된 북한말투를 통해 남과 북의 어법 차이를 살펴보자.

전문(前文)에는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과감하게 일어나가며…’란 대목이 나온다. 골자만 추리면 ‘시대를 일어나가다’이다. 이 부분은 금세 그리고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남에서 쓰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선 ‘일어나가며’가 가능하기 위해선 기본형 ‘일어나가다’ 또는 ‘일다’가 있어야 한다. 일단 ‘일어나가다’란 단어는 남북한 모두 사전에 없는 말이다(남 <표준국어대사전>, 북 <조선말대사전> 기준). 그렇다면 본동사 ‘일다’에 보조용언 ‘나가다’가 어울린 말로 볼 수 있다. ‘글을 써 나가다, 열심히 해 나가다’ 할 때의 그것이다. 이때 보조동사 ‘나가다’는 한글맞춤법상 띄어 쓰는 게 원칙이지만 붙여 쓰는 것도 허용했으므로 ‘일어나가다’란 말이 가능하다. 이제 ‘일다’를 규명해 보자. 우리의 ‘일다’와 북한의 ‘일다’는 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쓰는 ‘일다’는 ‘파문이 일다/불꽃이 일다/거품이 일다’처럼 쓰인다. 모두 자동사다. 선언문에 쓰인 ‘일어나가다’는 타동사이니 우리의 ‘일다’는 아니다.

달라진 북한말 알아야 남북소통

북한의 ‘일다’에는 여기에 ‘일구다’의 준말로 쓰는 용법이 있다. ‘일구다’ 자체는 남북한이 의미와 용법이 같다. 타동사로 쓰인다. ‘밭을 일구다’처럼 ‘땅을 갈아엎어 만들다’라는 뜻 외에 ‘승리를 일궈 내다/향토 문화를 일구는 데 앞장서다’처럼 ‘어떤 현상이나 일 따위를 일으키다(이루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평화번영의 시대를 일어나가다’는 곧 ‘평화번영의 시대를 일궈 나가다, 만들어 가다’란 뜻으로 해석된다. 선언문에 쓰인 ‘일어나가다’는 우리가 쓰는 ‘일구다’에 해당하는 북한말 ‘일다’에 보조동사 ‘나가다’가 어울린 말인 셈이다.

‘일어나가다’와 형태가 비슷한 ‘일어나다’는 어떨까? 이 말은 남북에서 모두 흔히 쓰인다. ‘자리에서 일어나다/산불이…/환호성이…/불교가…’ 등 10여 가지 쓰임새가 있다. 하지만 선언문에서처럼 타동사로 쓰이는 용법은 없다. 자동사로 쓰인다. 그러니 이 말도 아니다. 참고로 ‘일어나다’의 강세형이 ‘일떠나다’이다. ‘분발하여 힘차게 일어나다’란 뜻이다. 남에서는 이 말을 일상적으론 잘 쓰지 않지만 북에서는 흔히 쓰는 표현이다. ‘일어서다’를 강하게 말해 ‘일떠서다’라고 하는 식이다.

선언문 전반에 접미사 ‘-적’이 붙은 말이 많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전환적 국면’ ‘실천적 대책’ ‘주동적 조치’ 같은 표현은 꽤 낯설다. 3항 ①의 ‘남과 북은 그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을 데 대한…’ 문구도 우리가 쓰지 않는 어법이다. 이들에 대해선 다음호에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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