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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581호 2018년 2월 5일

문학이야기

[문학이야기(2)] 공무도하가



공무도하가. 대한민국에서 고교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면 모를 수 없는 작품이다. 길이는 짧아서 달랑 네 구. 그러나 그 네 구의 이면에 존재하는 서사는 심상치 않다. 고조선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새벽 강가에서 백수광부(머리가 하얗게 센 미친 사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아내가 쫓아가서 막으려 했으나 그 사람은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 그의 아내는 슬퍼하며 공후를 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 남편의 뒤를 따라 물에 뛰어들었다.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들려주자 여옥은 곧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탔는데 듣는 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리고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 여자 여용에게 전했는데 이를 공후인이라 일컫는다.

이것이 ‘공무도하가’에 얽힌 배경 설화이다. 고교 시절 이런 의문을 품었다. 왜 둘이나 되는 사람이 한 사람의 죽음을 말리지 못하고 사후에 슬퍼만 했을까. 또 노래라니. 왜 저들은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알 것 같다. 말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말릴 수 없는 비극이 그를 삼켰음을. 미처 손 써 볼 틈도 없이 급습하는 찰나의 이별이 세상에는 그리 드물지 않음을. 또 삶에는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비애와 아픔이 있고 배우자와도 나눌 수 없는 고통에 내몰리는 사람도 있음을. 그리고 또 이제는 안다. 통곡과 하나인 노래가 터져 나오는 순간, 노래는 남겨진 자들이 애도를 표하는 가장 순일한 형식이라는 것을. 고통은 광부의 것이고 슬픔은 남겨진 아내의 것이다. 그 슬픔을 다시 나누는 것은 뱃사공과 여옥이며 또 여용을 비롯한 함께 노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현존하는 가장 오랜 서정시이되 집단적 서사시에서 서정시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품으로 이해한다.

또 한 가지 작품을 대할 때마다 마음에 걸렸던 게 있다. 백수광부라는 호칭. 남겨진 이들이 저렇게 절절히 슬퍼하는데 저 아내의 지아비를 저렇게 얕잡아 칭해도 괜찮은가? 여옥들이 부른 저 노래의 형태를 지금의 우리는 알 수 없고 배경설화가 중국 문헌에 한역 시와 함께 전해진다. 이 두 호칭의 간극에 대해 고전문학 연구자 이규배는 시가 속 인물을 광부라 칭하는 것은 중국 한족인 채록자의 시각이고 공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아내와 조선인 거류민들의 시각이라고 설명한다. 또 그는 이 노래의 핵심 어구 ‘물을 건너다(渡河)’를 죽음을 각오하고 국경을 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공은 귀족이나 제후 등 아주 높은 신분이었을 것이다. 즉 ‘공무도하가’는 국경을 넘는 군사적 결단 끝에 목숨을 잃은 남편을 부인이 기린 노래이며 이 노래를 들은 거문고 예인-뱃사공이 아니라-곽리자고와 처 여옥이 공후라는 악기를 연주하며 불러 널리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의 해석에 동의한다면 두 호칭의 부조화가 해결된다. 아직 고교 과정에서는 다루지 않는 내용이다. 설명적 요소가 일절 없는 네 구의 시가. 그것도 한역 시를 읽으며 노래의 원형과 배경을 알아내기는 힘들다. 작품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연구자들의 몫이겠지만 짧은 시행에 얹혀 몇 번의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부족한 사료의 여백을 메우는 상상력은 우리도 있으니. 그러니 과연 ‘공’은 누구일까?

비극을 품은 물이 이곳과 그곳, 이승과 저승, 나와 임을 단절시킨다.

공이시여 또는 백수광부시여 부디 그 물을 건너지 마시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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