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연코일 독점업체, 특정 회사에 판매 거부
공정위 "부당한 공급 거절… 시장경쟁 저해"

대법원 "경쟁제한 '의도' 입증돼야 독점지위 남용
사업상 불이익 발생한 사실만으론 성립 안돼"
[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 거래 거절한 독점기업, 제재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 거래 거절한 독점기업, 제재할 수 있을까?
시장경제에서 독과점 상태는 규제 대상이다. 우리 법체계에서 독과점 규제는 두 가지 특징을 보여왔다. 시장지배적 지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위 남용을 규제한다는 점, 그리고 금지하는 남용 행위들이 불공정 거래 행위와 유사한 외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두 유형에 모두 해당하는 행위가 발생할 경우 독점기업에 의한 것이라면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으로, 일반 기업에 의한 것이라면 불공정 거래 행위로 규제되는 것으로 생각돼 왔다.

그런데 이 같은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은 판결이 200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의해 내려졌다. 공정거래법 관련 판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얘기되는 이 판결로 독점기업의 지위 남용 문제에 관한 공정거래위원회와 법원의 시각에 커다란 차이가 드러났으며, 이후 공정위의 규제 방향에도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중간재 거래처의 ‘공급 거절’

자동차의 뼈대가 되는 차체는 냉연강판이라는 특수가공 철재로 제조하는데, 이 철재는 열연코일이라는 중간재를 가공해 생산한다. 자동차 제조업체 A사는 냉연강판을 줄곧 철강업체 P사 등에서 구입했다. 그런데 1999년 A사와 계열 관계에 있는 철강업체 H사가 자동차용 냉연강판 생산설비를 신설해 이 시장에 진출했다. 문제는 H사가 냉연강판을 생산하려면 그 소재가 되는 열연코일을 독점 공급자인 P사에서 구입해야만 하는데, P사가 공급을 거절하는 일이 발생했다. H사는 P사의 행위가 독과점적 지위를 남용한 것이라고 보고 공정위에 신고했다.

이 사건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P사가 과연 시장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지 △P사의 거래 거절로 H사의 사업활동이 방해받았는지 △H가 사업활동을 방해받았다면 그것이 부당한 것인지다. 공정위는 P사가 열연코일 시장에서 지배적 지위를 가진 사업자가 분명하며, H사에 대한 거래를 거절함으로써 부당하게 사업활동을 방해해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고 판단하고 P사를 상대로 시정조치와 과징금을 부과했다. P사는 공정위 결정에 불복해 서울고등법원에 행정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서울고법 역시 공정위와 같은 취지로 P사의 주장이 이유 없다고 보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부당한 경우에만’ 문제”

5년 만에 내려진 최종심 판결에서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는 한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은 먼저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와 불공정 거래 행위 모두 ‘부당한 경우에만’ 문제가 되는데, 여기서 양자의 ‘부당성’ 의미가 서로 다르다고 봤다. 거래 거절로 상대방이 겪는 곤란이 공정거래를 저해하는 수준이면 불공정 거래 행위로, 시장의 경쟁을 제한하는 정도까지 더 나아가면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이 된다는 것이다. 독과점 규제와 불공정 거래 행위 규제는 다른 차원으로 봐야 하고 독점규제의 독자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선언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다음에 이어진 판결 내용이었다. 대법원은 공정거래법상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에서의 부당성이 충족되려면 시장에서 독점을 유지·강화할 의도나 목적, 즉 자유로운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시장질서에 영향을 가하려는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있고, 객관적으로도 그런 효과가 생길 만한 우려가 있는 행위로서의 성질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고 봤다.

공정위, 부당한 의도나 목적 입증해야

요컨대 행위자에게 경쟁 제한 의도나 목적이 있었고, 실제로 그 행위로 경쟁 제한 우려가 발생했다는 점이 공정위에 의해 입증돼야만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특정 상대방과의 거래를 거절했다거나 그로 인해 상대방이 사업활동에 불이익을 당하게 됐다는 사정만으로는 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관적, 객관적 요건들은 법 조문 해석을 통해서는 도출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런 법리를 적용한 결과 P사는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났으며 공정위 처분은 취소됐다. 이 판결로 공정거래법을 토대로 독점기업에 의한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을 규제해온 공정위는 위법성 규명을 위해 매우 큰 입증 부담을 지게 됐다.

실제로 이 판결 이후 인터넷포털 사업자, 케이블방송 사업자, 음원서비스 공급자 등의 지위 남용 여부가 문제된 다수 사건에서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판단했지만 법원은 부당성을 부인한 바 있다. 논란과 관계 없이 이 판결은 이미 독과점 규제의 확고한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신영수 < 경북대 로스쿨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