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가정은 '면도칼'로 잘라내야 한다"
허구적 관념이 지배했던 중세철학에 종지부 찍었죠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9) 오컴 (하) 오컴의 면도날
논리비약·불필요한 전제가 토론 방해

오컴의 주장은 말하자면 “무언가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가정을 사용하여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면도날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 버린다는 비유로, 필연성 없는 개념을 배제하려 한 “사고 절약의 원리”라고도 불린다. 그렇다면 오컴의 면도날이 겨냥하고 있는 ‘불필요한 가정’이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간단한 유머를 통해 이를 알아보자.

무인도에 표류한 물리학자, 화학자, 경제학자 앞에 통조림이 하나 파도에 떠밀려오자 논쟁이 벌어졌다. 물리학자가 돌멩이로 쳐서 따자고 주장하니까 화학자는 불을 피워 가열하는 게 좋겠다고 맞섰다. 가만히 듣고 있던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날 밤 경제학자는 ‘통조림을 먹은 것으로 가정하고’ 잠이 들었다는 유머다. 이 유머는 너무 많은 것을 미리 가정하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비현실적 자세를 꼬집고 있다. 여기서 통조림 따개가 없는 상황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제학자의 자세가 어이가 없다. 이 부분이 바로 불필요한 가정이다. 아니 통조림 따개가 있다면 토론할 이유조차 없지 않은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콜라 철학 접목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9) 오컴 (하) 오컴의 면도날
그런데 중세 때는 이처럼 많은 것을 미리 가정하고 현상을 설명하려는 비현실적 사례들이 많았다. 당시 중세 사회에서는 스콜라 철학적 신학이론과 형이상학적인 주장들이 보편적 진리로 행세했다. 오컴은 그러한 허구적인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상식과 현실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자세로 사물을 분석하려 했다. 한 예로 당시 신의 존재 증명에서 드러난 아퀴나스의 불필요한 가설을 면도날과 같이 도려내는 오컴의 예리한 비판을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아퀴나스에 의해 스콜라 철학으로 통합되었다. 스콜라 철학의 우주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그대로 이식받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는 구석구석까지 물질을 가득 채운 구로서 진공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운동은 움직이게 하는 힘과 움직여지는 물체 사이에 접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아퀴나스의 신의 존재에 관한 첫째 증명은 ‘천구의 운동은 제1 추동자, 즉 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많은 전제가 증명 방해해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9) 오컴 (하) 오컴의 면도날
그러나 오컴은 천구의 운동 자체가 신의 존재 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아퀴나스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최초 운동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컴은 신의 존재에 관한 아퀴나스의 첫째 증명의 타당성을 부정했다. 오컴은 모든 천구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신이 최초에 부여한 추동력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이 최초의 운동을 준 것은 틀림없지만 현재의 천구 운동이 곧 신의 존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컴이 보기에 아퀴나스에 의한 신 존재 증명은 필연적인 논증이 아니고 개연적인 것일 뿐이다.

한 가지. 오컴이 스콜라 철학의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한 것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무한하고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신의 존재는 오직 신앙으로만 알 수 있다.

비록 중세 말기 방법론이었지만 근대의 싹을 가진 ‘오컴의 면도날’은 이성이 개입해서는 안 될 신의 영역으로 뛰어든 결과로 빚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철학과 신학이 분리하는 결과를 낳아 중세 철학의 종결을 선언하고 근대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오컴의 면도날’의 개념이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것은 그 기능이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해주세요

간단하게 오컴의 면도날을 설명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중세 철학자들과의 복잡하고 광범위한 논쟁 속에서, 오컴은 무의미한 진술들을 토론에서 배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지나친 논리비약이나 불필요한 전제를 진술에서 잘라내는 면도날을 토론에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김홍일 <서울 국제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