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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569호 2017년 9월 25일

서양철학 여행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6) 아우구스티누스 (하) 고백록

신의 은총과 관용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뉜다. 1권부터 9권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체험한 회심을 정점으로 살아온 시간을 회고하며 신의 은총을 찬양한다. 10권에서는 회심의 주체인 자아와 기억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통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11권부터 13권까지는 창세기 해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혹시 자신이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 신 앞에 선 한 인간의 고백의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백록》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회심하는 과정이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회심 장면이 결정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회심 직전 그의 자기성찰 대목이다.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

왜 신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도록 했을까? 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스스로를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시각 없이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는 법. 자기 성찰 없이 본래부터 착하게 사는 것은 천진무구한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고, 자기 성찰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은 불한당으로 살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성찰을 회피하려고 무척이나 애쓴다.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자신의 등 뒤에 놓아두었다는 그의 고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가 자신을 살피기 싫은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부끄러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자신을 대면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하며 신이 부여한 성찰의 기회를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아성찰을 통한 회심 과정을 이해하려면 전 편에 살펴본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 즉 우리 몸이 사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영혼이 사는 마음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을 적용하면, 그의 회심은 크로노스적 시간을 보내는 삶으로부터 돌이켜 카이로스적 시간을 보내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크로노스의 삶과 카이로스적 삶

회심 전 아우구스티누스는 끊임없는 유혹에 흔들리는 부끄러운 생활을 한다. 부끄러운 과거는 흘러가고 없으며 순간을 즐기면 된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크로노스 안에서 인간의 삶은 단지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 허무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따라서 부끄러운 자신은 자신의 등 뒤에 놓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회심 전 아우구스티누스는 크로노스적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함으로써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되는 하나의 통일체로 사고하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보내는 삶으로 돌아온다. 카이로스는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영혼 안에서 나란히 겹쳐 놓임으로써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초자연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 잃어버린 것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존재의 시간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작용이 연속성을 지니기에 가능한 일임은 물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자신의 내면의 치부를 솔직하고 치열하게 고백한 것은 바로 그가 영원한 신 앞에서 사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보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기억해주세요

왜 신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도록 했을까? 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스스로를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시각 없이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는 법. 자기 성찰 없이 본래부터 착하게 사는 것은 천진무구한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고, 자기 성찰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은 불한당으로 살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김홍일 < 서울국제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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