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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564호 2017년 8월 21일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 기업인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25) 녹십자 허영섭

한국은 백신의 강국이다. 2010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 한국의 제약사가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백신 납품 자격을 인정받았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였다. 제약 기업인 녹십자 이야기다.

세계 6번째로 신종플루 백신 납품

전자산업이나 자동차산업에 비한다면 한국의 제약산업은 많이 뒤떨어졌다. 화이자(독일), 노바티스(스위스), 로쉬(스위스) 등 세계적 제약사들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혈액제제인 백신만은 녹십자의 한국산 백신이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

녹십자의 뿌리는 1967년에 세워진 ‘수도미생물약품’이다. 동물용백신 제조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1969년 극동제약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71년에는 (주)녹십자로 상호를 바꿨다.

녹십자를 백신 전문 제약사로 성공시킨 사람은 허영섭이다. 1941년생으로 원래 교수가 되고자 독일에 유학 중이던 공학도였다. 그가 제약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70년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서 근무하면서부터다. 유학생이라도 입영을 연기할 수 없도록 법이 바뀌는 바람에 허영섭은 독일 유학 중 귀국해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 입사했다.

필수의약품 국산화

이 회사의 대주주 허채경은 허영섭의 부친이었다. 개성 상인으로 한일시멘트를 세워 성공한 기업가였다. 군의감(군의관 중 최고직) 출신 국립보건원장이던 김수명 씨의 청을 받아 혈액제제 사업에 투자하게 됐다. 혈액 관리는 전쟁 등 국가 비상사태 시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허영섭에게 녹십자는 의무복무 기간만을 채우려고 들어간 곳인데 평생을 함께한 기업이 됐다. 처음에는 공무부장으로 시작했지만 곧 중요한 결정에 관여하면서 떠날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갔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사명인 극동제약을 녹십자로 바꾼 것도 허영섭의 아이디어와 노력 덕분이었다.

1980년 허영섭은 녹십자 사장이 됐다. 필수의약품의 국산화를 녹십자의 비전으로 정한 그는 국산 신약을 개발하는 데 많은 투자를 했다. 한국 제약 기업으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한국 제약회사들은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복제해서 파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허영섭은 독자적인 신약 개발에 도전했다. 유로키나아제 등 여러 건의 성과들이 있었고 사업도 성장했다.

결정적 도약의 계기는 1983년에 찾아왔다. B형 간염백신인 헤파박스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12년 연구 끝에 이룬 성과였다.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였다. 헤파박스 매출 덕분에 연간 매출은 그 전해의 250억원에서 528억원으로 뛰었다. 한국기업경영력 평가에서 10대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헤파박스는 녹십자에만 성공을 안긴 것이 아니었다. 간염으로 고생하던 환자들이 수입가의 3분의 1 가격에 국산 백신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그 덕분에 B형간염 보균율도 13%에서 7%로 떨어졌다.

민간연구소 설립 ‘도약’

신약 개발의 중요성을 절감한 허영섭은 1983년 녹십자의 대주주들을 설득해 최초의 순수한 민간연구소(현 목암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본격적인 연구소는 국가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다행히 이곳에서 많은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88년 유행성출혈열 백신(한타박스, 세계 최초), 1993년 수두백신(세계 두 번째), 2009년 신종플루 백신 등이 대표적 결과물이다.

2009년 허영섭은 68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주식 등 유산은 본인의 뜻에 따라 3분의 2는 장학재단과 연구재단에 기부됐고, 가족에게는 3분의 1만 상속됐다. 녹십자그룹의 경영은 동생 허일섭과 허영섭의 차남 허은철 등이 공동으로 맡고 있다.

허영섭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신약 개발의 길을 걸어간 사람, 백신 개발을 통해 한국인의 질병 치료에 기여한 기업가였다. 그가 남긴 뜻대로 녹십자가 글로벌 제약사로 성공하길 바란다.

기억해 주세요

독일로 유학 간 공학도였던 허영섭은 다소 엉뚱한 길인 제약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뒤 간염, 유행성출혈열, 신종플루 백신을 잇따라 개발해 국민 질병 치료에 크게 기여했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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