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수재를 당했을 때는 '초토화'가 아니죠
초토화는 본래 화재를 당하거나 폭격 따위로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현장을 나타낼 때 적합한 말이다. 수재(水災)를 당했을 때는 ‘초토화’ 대신 문맥에 따라 ‘쑥대밭’이나 ‘아수라장’ 따위를 쓰는 게 좋다.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한여름을 달구던 불볕더위도 한풀 꺾여 이제 아침저녁으론 제법 선선한 느낌이다. 처서(處暑·8월23일)를 앞두고 있으니 절기상으로는 이미 가을에 접어들었다. 올여름은 늦게까지 이어진 장맛비로 지역에 따라 폭우가 쏟아져 곳곳에서 물난리를 겪기도 했다. 그럴 때 무심코 잘못 쓰기 쉬운 말 중에 ‘초토화’를 놓칠 수 없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충북지역 초토화.” “호우 피해로 초토화된 농경지.” “최악의 폭우로 기록된 충북 청주지역은 하루에만 300㎜에 가까운 집중호우가 내리면서 초토화됐다.”

‘초토’는 불에 타 그을린 땅

태풍으로 폭우가 휩쓸고 지나가거나 집중호우로 홍수가 져 큰 피해를 입었을 때 흔히 ‘수마(水魔)가 할퀴고 지나가다’란 말을 쓴다. 그리고 거기에 습관적으로 따라붙곤 하는 말이 ‘초토화(焦土化)’다. 하지만 이 말은 물난리로 피폐해진 곳에 쓰기엔 적절치 않은 점이 있다. ‘초토(焦土)’란 글자 그대로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을 말하기 때문이다. 한자 焦가 ‘(불에)그을리다, 불타다’를 뜻한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초미(焦眉)의 관심사’란 게 있는데, ‘아주 다급하고 중요한 관심사’라는 뜻으로 쓰인다. 눈썹(眉)에 불이 붙었으니(焦)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랍고 애가 타는 상황일지 짐작이 간다.

마찬가지로 초토화는 본래 화재를 당하거나 폭격 따위로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현장을 나타낼 때 적합한 말이다. “마을이 불타 순식간에 초토가 됐다” “가스 폭발로 공장이 초토화됐다”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시” 같은 게 전형적인 표현이다. 좀 더 넓게는 ‘불에 탄 것처럼 황폐해지고 못 쓰게 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가령 ‘시장 개방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산업이 초토화할 우려가 제기됐다’느니, ‘소행성이 지구를 강타할 경우 그 파괴력은 대륙 하나를 초토화시킬 정도다’처럼 쓰인다. 이 역시 ‘황폐해진 상태’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일 뿐, 직접적으로 수해를 당한 것을 두고 하는 표현은 아니다.

‘쑥대밭’ ‘아수라장’이 적절한 말

수재(水災)를 당했을 때는 ‘초토화’ 대신 문맥에 따라 ‘쑥대밭’이나 ‘아수라장’ 따위를 쓰는 게 좋다. ‘쑥대밭’은 쑥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거친 땅을 말한다. 여기서 의미가 확장돼 ‘매우 어지럽거나 못 쓰게 된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됐다. ‘쑥대+밭’의 구성으로 된 합성어이다. ‘쑥대’는 물론 쑥의 줄기를 이른다. ‘쑥대’와 어울려 이뤄진 말에는 ‘쑥대머리’도 알아둘 만하다. 이는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져 어지럽게 된 머리’를 가리킨다. ‘쑥대밭 같은 머리카락’, 그것이 곧 쑥대머리다. 한자어 ‘봉두난발(蓬頭亂髮)’도 같은 말이다. 사람에 따라 이 말을 더 익숙해할 것인데, ‘머리털이 쑥대머리같이 텁수룩하게 마구 흐트러진 것’을 뜻한다.

불교 용어에서 온 ‘아수라장’도 골라 쓸 만하다. 이는 극심하게 혼란스러운 상태를 나타낼 때 적절한 말이다. ‘수도권 강타한 폭우…쓰레기로 하천 아수라장’ ‘인천 지역에는 시간당 100㎜에 가까운 집중호우가 쏟아지면서 한 명이 숨지고 주택 600여 채와 주요 간선도로가 침수되는 등 아수라장이 됐다’처럼 쓴다. 그 정도가 지나쳐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상태라면 ‘아비규환’이다. 사람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뒤죽박죽이 됐으면 ‘난장판’ ‘깍두기판’이라고 한다.
이를 더욱 속되게 말하면 ‘개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리 품위 있는 표현이 아니므로 조심해서 써야 한다.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