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사업에서 석유 거쳐 이동통신까지 진출…유전 사들여 한국을 산유국 반열에 올렸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 한국인들이 자원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음을 한탄하는 푸념이었다. 그러나 이젠 잘 안 맞는 말이다. SK이노베이션은 페루 베트남 등에서 매일 5만9000배럴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직접 개발해서 소유하고 있는 유전들이다.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6) 한국을 산유국으로 만든 최종현
■기억해 주세요^^

SK의 전신인 선경직물은 옷감을 짜는 회사였다. 부친이 갑자기 별세하자 경제학자의 꿈을 접고 귀국해 회사를 성장시켰다. 장학사업에 뜻을 두고 인재를 키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경제학 박사가 꿈 … 형 돕기 위해 귀국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6) 한국을 산유국으로 만든 최종현
이것이 가능하게 만든 사람은 SK의 전(前) 회장 최종현이다. 그는 SK가 옷감 짜는 회사(선경직물)였을 때 옷감 원료인 석유를 생산하는 비전을 세우고 이뤄냈다. 최종현은 원래 경제학자가 되려 했다.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귀국했다. 그런 그에게 형인 최종건이 선경직물(SK의 전신)에 들어와서 일을 도와달라고 청을 했다. 회사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형은 불도저처럼 일을 벌이기는 잘했지만 차분함은 부족했다. 치밀하고 생각이 깊은 동생의 도움이 절실했다. 최종현은 회사의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만 돕겠다며 일을 시작했다. 1962년의 일이다.

두 형제가 힘을 합치자 회사가 다시 살아났다.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고 홍콩에 수출도 할 수 있게 됐다. 일본 기업의 투자를 받아서 옷감의 원료인 폴리에스터 생산 공장까지 세우는 데 성공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최종현은 경제학 박사의 꿈을 자연스럽게 접어야 했다. 그러던 중 1973년 형인 최종건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최종현은 선경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때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비전을 선포한다. 지금 비록 실을 잣고 옷감을 짜는 회사이지만 머지않아 그것의 원료인 석유까지 생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섬유공장에서 정유공장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허황된 꿈이 분명했다. 정유공장이나 석유화학공장을 지으려면 섬유공장의 10배는 더 큰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현은 한 걸음씩 내디뎠다. 원유공급 능력만 확보하면 투자금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유 확보를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왕족들과 만나서 신뢰를 쌓아갔다. 세계 석유업계에 실력자인 사우디의 야마니 석유상과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러던 중 오일 쇼크가 터졌다. 중동 국가들이 미국과 그 우방들에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한국도 미국의 우방이었다. 원유 재고가 10일밖에 안 남았지만 대통령이 나서도 석유금수를 풀지 못했다. 이때 최종현이 야마니 석유상을 설득해서 석유금수 조치를 풀어냈다. 평소에 쌓아놨던 신뢰가 빛을 발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입증된 원유 확보 능력 덕분에 1980년 민영화되는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유전개발에까지 나서게 됐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최종현은 ‘석유에서 석유까지’의 꿈을 이뤘다. 한국도 산유국이 됐다.

한편 최종현은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회사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실행하는 체제로 바꿔갔다. 일상적 경영의 책임은 손길승 사장을 비롯한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그리고 본인은 미래 먹거리를 찾는 일에 전념했다.

한국고등교육재단 세우다

석유 다음으로 찾아낸 답은 이동통신이었다. 누구나 손에 전화기를 들고 다닐 날을 내다본 것이다. 그렇게 결정하자 통신기술이 가장 앞선 미국에서 테스트 사업을 시작했다. 거기서 쌓은 실력으로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고 지금의 SK텔레콤으로 발전시켰다. 그렇게 그는 하나씩 커다란 꿈들을 이루어가다가 1998년 폐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못 이룬 꿈도 있다. 세계적인 사회과학 전문대학원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을 위해 1974년 사재를 내서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세우고 인재를 선발해서 유학을 보냈다. 이들이 활동할 대학원을 만들기 위해 충주 인근에 여의도의 14배 넓이의 숲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30년 후 나무가 다 자라면 매년 30분의 1씩 목재를 팔아서 학교운영 비용으로 쓰고 그 자리엔 다시 나무를 심어서 기를 계획이었다. 그렇게 배출된 박사 숫자가 690명이다. 아쉽게도 교육당국이 허가를 안 내줘서 대학원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재단 출신 학자들이 왕성하게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충청도의 인등산에는 40년 넘는 나무 300만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