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8) 북한 출신 기업인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는 북한 출신 기업가들이 세운 곳이 많다. 몇 군데 예를 들자면 파리바게트의 SPC 그룹, 화장품 기업 아모레퍼시픽, 대한전선, 진로 같은 곳이다. 오늘은 이들의 이야기다.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공산정권 들어서자 북한 기업인들 남한으로…SPC·아모레퍼시픽·진로·대한전선 일궈
■기억해 주세요^^

공산당은 개별적인 기업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아서, 개인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국가의 소유로 했다. 그런 곳에서 기업활동은 불가능했다.


일본빵집에서 일 배운 허창성

아모레퍼시픽 사옥
아모레퍼시픽 사옥
SPC라는 이름의 뜻은 삼립-파리바게트 회사다. 허창성이 세운 삼립식품이 그 뿌리이다. 허창성은 황해도 해주 사람인데 어릴 적 일본인 빵집에서 일을 배워 상미당이라는 빵집을 열었다. 물론 장소는 고향인 해주였다.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다시 가게를 차렸다. 빵 만드는 일을 현대화해서 삼립식품이라는 식품기업으로 키워냈다. 허창성의 차남 허영인은 그것을 다시 SPC라는 새로운 개념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개성 사람 서성환은 화장품 사업을 일으켰다. 해방 전 그는 개성에서 어머니 윤독정 여사와 함께 세안수(얼굴 닦는 액체)와 동백기름(머리에 발라서 윤이 나게 하는 기름) 장사를 했다. 해방이 되자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본격적인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다. 회사의 이름은 태평양화학이라고 붙였다. 사업이 잘 됐으나 70년대에 들어 지나친 다각화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것을 차남인 서경배가 맡아서 구조조정을 하고 화장품 사업에만 집중한다. 또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한다. 그 결과가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이다.

‘참이슬’ 창업자 장씨는 평안도 뿌리

함경도 출신 기업가로는 지난번에 칼럼에서 소개한 동양제과의 이양구 말고도 설경동이 있다. 함경도 철산 사람인데 어릴 적부터 장사를 시작해서 청년기에는 정어리 잡이로 큰 성공을 거뒀다. 해방 후 남한으로 왔고 여러 사업을 거쳐 전선사업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 결실이 대한전선이다. 2대에 걸쳐 한국의 대표적 전선 기업으로 성장시켰지만 우여곡절 끝에 부도로 막을 내렸다. 대한전선은 이제 ‘IMM’이라고 하는 사모펀드가 인수해서 새 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 술이라고 할 수 있는 참이슬도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 출신 기업가가 만들었다. 평안도 용강의 장학엽은 고향에서 진천양조라는 양조장을 했다. 증류식 소주를 만들어 팔았는데 이름을 진로라 하고 원숭이 모양을 상표로 썼다. 해방 후에는 서울로 와서 술사업을 계속했다. 술의 이름은 같았지만 상표는 두꺼비로 정했다. 북한 사람은 영특하다며 원숭이를 좋아했지만 남한 사람들은 잔망스럽다고 싫어했다. 고민하다가 남한 사람들이 즐겨쓰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어 두꺼비를 상표로 택했다. 토종 남한 소주인 삼학소주와의 경쟁에 승리해서 대한민국 대표 소주가 되었지만 아들 대에서 부도가 났다. 지금은 맥주회사인 하이트가 인수해서 참이슬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에서 사업을 하던 기업가들이 대거 남으로 내려온 것은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개별적인 기업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예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아서, 개인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국가의 소유로 했다. 그런 곳에서 기업활동은 불가능했다.

기업가들 남쪽으로 내려와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기업가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반면 과학자들 중에는 북쪽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많다.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를 동경한 과학자들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북한 정권이 적극적으로 스카우트 작전을 폈던 때문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해방 전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던 과학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서 김일성종합대학 등의 교수로 채용함은 물론 소련과 동독 등 대학들에 유학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삼겠다고도 했다. 그 결과 많은 과학자들이 북한으로 넘어갔다. 리승기, 도상록 같은 뛰어난 과학자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남한 출신 과학자들은 북한경제의 주역이 되었다. 1950년대말 천리마운동의 성공에는 남한출신 과학자들의 기여가 컸다. 핵무기의 개발 과정에서도 그랬다.

사실 과학자와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은 스탈린의 소련이 먼저 시작했다. 북한은 그것을 그대로 따라한 셈이다.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학자들까지 소련의 체제가 자본주의를 압도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압에 기초한 경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소련이 먼저 붕괴되었고 북한 경제 역시 실질적으로 붕괴했다.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기업체제임을 우리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