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4) 임상옥 시대와 박승직 시대의 차이점
박승직, 김성수, 김연수, 박흥식 등 초기의 기업가들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연재했다. 이들 개화기의 기업가들이 초기의 본격적 기업가들이기는 하지만 최초라고 말하긴 어렵다. 조선조에도 이미 원초적 형태의 기업가, 즉 상인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본격적인 기업가라고 말하긴 어렵다. 박승직부터 시작되는 개화기의 신흥 상인들과는 행동 방식이 많이 달랐다. 그 차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임상옥(좌), 김만덕(우)
임상옥(좌), 김만덕(우)
■ 기억해 주세요^^

기업가 정신이 우리나라에 생기기 시작한 것은 갑오개혁 이후부터입니다. 이전에 상업은 천한 직업으로 홀대받았어요.

개처럼 번 뒤 정승처럼 폼내면서 살다

조선조 상인의 대표 격은 철종 때의 임상옥이다. 소설가 최인호가 그의 일생을 상도(商道)라는 소설로 출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중국과의 인삼거래로 큰돈을 벌었다.

임상옥이 박승직, 김연수 등 개화기의 상인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돈을 번 후의 행동이다. 박승직 등은 돈 버는 데에 성공한 후에도 그 성공을 기반삼아 사업을 더욱 크게 키워나갔다. 자식들에게도 물려줬다. 반면 임상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단 큰돈을 벌자, 장사를 그만 두고 벼슬길에 나섰다. 수재 의연금을 낸 공으로 곽산 군수가 되었고, 더 이상 승진이 안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안빈낙도의 생활을 시작했다. 좋은 집을 지어 놓고 선비들을 두루 불러 세상을 논했고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장사는 천한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버려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벌면 양반 족보와 벼슬을 사서 어떻게든 팔자를 바꾸려 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갑오개혁 이후 사농공상→상공사농

제주 거상으로 유명한 김만덕도 임상옥처럼 벼슬을 얻은 뒤 장사를 버렸다. 어릴 적부터 기생이었던 김만덕은 우여곡절 끝에 상인이 된다. 그리고 육지와의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제주에 큰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일이 생겼다. 김만덕은 육지에서 식량을 사들여 그들에게 나눠준다. 그 소문이 육지로도 퍼졌고 급기야 임금님(정조) 귀에 까지 들어갔다. 정조 임금께서 만덕을 알현하려 했지만 신분이 문제가 되었다. 상인인데다가 기생 출신이기까지 하니 천해도 너무 천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의녀반수 벼슬이 내려지고, 만덕은 임금을 알현할 수 있었다. 제주도로 돌아간 뒤 존경을 받으면 살았지만, 물론 장사는 안했을 것이다. 벼슬한 자는 장사를 해서는 안됐다.

장사는 더럽고 천한 일이라 나라에서도 못하게 막았다. 기업활동 즉 상업은 ‘사농공상’ 신분질서의 가장 끝(末)이었다. 정도전이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무본억말(務本抑末)은 농사에 힘쓰고 상업(末)은 억제한다는 뜻이다. 상업을 불가피한 최소한의 수준으로 억제하기 위해 몇 안 되는 육의전 상인에게만 허용했다. 몰래 장사하는 사람들은 난전이라고 불렸으며 언제든 물건을 빼앗기고 치도곤을 당하는 처지였다. 임상옥도 김만덕도 따지고 보면 난전이었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부터였다. 이때 육의전의 독점권이 폐지되어 누구나 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업 활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이다. 상인들은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장사꾼도 잘만 하면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게 되었고, 자식에게 물려줄 만하다는 인식도 생겨났다. 그 결과 상인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정직 신용 성실이 덕목으로 자리매김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정직, 신용, 성실은 개화기 이후 성공한 기업가들의 공통적인 덕목이다. 박승직(두산), 김성수·김연수(경성방직), 박흥식(화신) 등이 모두 정직하고 신용을 잘 지킨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눈속임하며 불량품을 팔고, 빌린 돈 안갚는 자가 어떻게 성공하겠는가. 그런 자들에게서는 사람들이 떠난다. 정직하고 신용을 잘 지켜야 소비자와 투자자가 몰려들어 성공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원리가 작동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한데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상인들이 언제 뺏길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였기 때문에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만 취했다. 갑오개혁으로 상업 활동이 합법화되면서 상인들은 긴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정직과 신용을 갖춘 상인들이 눈 앞의 이익만 취하는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런 상인들, 기업가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