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동성애자 차이코프스키의 죽음 자살인가, 타살인가, 병사인가 ?
■ 체크 포인트
인간의 삶을 단칼에 무 자르듯 재단할 수는 없어요. 인간과 역사는 원래 복잡하고 다층적인 것이지요.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로 불변이다. 하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사건의 의미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당대인이나 후대 역사가들이 존재를 몰랐던 문서나 서신,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고, 역사적 인물 본인이 감췄던 비밀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을 단칼에 무 자르듯 재단할 수 없다. 인간과 역사란 본디 다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도 어떻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보자. 차이코프스키(1840~1893)의 사망 원인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병사인가? 정설은 ‘셋 모두 다’이다. 최근에는 사고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죽음은 하나인데 원인이 서너 개인 경우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차이코프스키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관습으로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37세 때 처음 결혼하지만 두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 얼마나 가정생활이 힘들었던지 차이코프스키가 투신자살까지 시도할 정도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우울증을 앓았다. 공식 정신과 진료 기록도 세 차례나 있다. 인생의 각기 다른 시기에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받을 만큼 마음의 평정이 깨져 있었다는 뜻이다.

동성애자들에게 혹독했던 제정 러시아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였던 듯하다. 문제는 제정 러시아가 동성애자들에게 혹독한 사회였다는 점이다. 동성애를 하다 적발되면 정당한 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사자를 처형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형벌이 종신형이었다. 연좌제 비슷한 제도도 있었다. 친구 가운데 누군가가 처벌받으면, 그의 동기생이나 친척들에게 유무형의 불이익이 가해지는 관습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는 공무원 동창들의 ‘면직’을 뜻했다. 그는 법률학교 출신이다.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학교를 다녔다. 본인은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했는데, 법률학교 합창단에서 열심히 활동한 기록이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1859년 법률학교를 졸업한 뒤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고 1960년 루빈시테인 형제의 제안으로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에 1기생으로 입학, 직업과 인생을 바꾼다.

그의 동성애 스캔들 상대는 법률학교 시절 기숙사 후배다. 당대 실권자인 스텐본크 톨몰 공작 동생의 아들이다. 1893년 가을, 이 스캔들은 ‘거의 확정된 사실’의 형태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현직 법률가와 고관인 차이코프스키의 친구들이 그를 불러다 일종의 ‘권유’를 했다. ‘죽음으로서 명예를 지켜라.’ 차이코프스키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11월3일 그는 콜레라가 창궐하던 오데사로 간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려 사흘 만에 숨을 거둔다. 차이코프스키의 장례식에는 6만명의 추도객이 모였고, 당국이 발표한 공식 사인은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신 데 따른 콜레라 감염’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정말 노량해전서 전사했을까

추모객 가운데 많은 사람이 차이코프스키의 유해에 키스했는데 콜레라 감염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상당히 부유한 삶을 영위했다. 전염병 감염 경로인 ‘지저분한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례식 직후 그의 사인(死因)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당대인들은 공작이 차이코프스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설, 당시 현직 검찰 부총장이자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독극물을 전달했다는 설 등을 믿었다. 공작이 러시아 황제에게 차이코프스키를 고소했고, 이 고발장을 넘겨받은 야코비가 일이 확대되기 전에 앞에서 이야기한 ‘비밀 사설 명예재판’을 열고 독극물을 건넸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나중에 ‘유력한 설’로 격상된다.

콜레라의 증거는 쌀뜨물 같은 설사다. 문제는 비소를 먹은 경우에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1979년 소련 문화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비소가 검출되었다. 자, 그렇다면 차이콥스키의 사망 원인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병사인가 사고사인가.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당대 기록인 ‘김충장공유사(김덕령 장군 추모기)’에는 ‘이순신은 전투 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현대 학자들은 ‘충무공 자살설의 역사적 근거는 박약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선조가 이순신을 시기한 것은 사실이다. 역사는 다양한 방향에서 비춰봐야 진실이 드러나는 다면입체(多面立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