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남고(男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

추효빈 생글기자(KML HIGH SCHOOL 11학년 )
추효빈 생글기자(KML HIGH SCHOOL 11학년 )
최근 성차별에 관한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남녀 차별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성차별의 뿌리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여자고등학교를 일컫을 때 학교 이름에 여자고등학교를 넣는다. 허나 남자고등학교는 그렇지 않다. 이는 한국에서 인간의 기본과 어원은 ‘남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고등학교 중 이러한 언어적 취지를 반영해 ‘여자’를 안 붙이는 여자고등학교는 생겨도 ‘남자고등학교’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언어는 우리 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며느리는 집안에 기생하는 존재, 그리고 올케는 오빠의 계집을 의미한다. 또한 긍정적이거나 중성적인 ‘남녀, 신사 숙녀, 형제자매’의 언어는 남자가 먼저이지만, 부정적인 언어는 예를 들면 ‘어미 아비’는 여자가 먼저다. 이러한 예시처럼 우리나라에는 무의식적 성차별 언어가 깔려있다. 하지만 성차별 언어에 대한 시민의식은 현저히 떨어진다.

2015년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의 ‘페미니스트’ 정의가 잘못됐다며 수정을 요청했다. 표준국어 대사전은 ‘페미니스트’를 여권 신장 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 여성을 숭배하는 사람 또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로 정의하는데 이러한 잘못된 정의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오해를 키운다는 게 여성연합의 주장이다.

이처럼 성차별, 성 비하적인 언어는 한국뿐만 아닌 세계적으로 뿌리를 잡고 있다. 언어적 표현이나 관습들은 그 나라의 문화와 정신을 담고 있다. 전통적인 여성차별이 언제나 존재했음에도 지금껏 사회현상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은, 여성차별은 사회에서 거론할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우리는 더욱더 문제를 인지하고 바꾸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aves.

추효빈 생글기자 choo17@gmail.com

저축의 습관…은행문을 두드려라

김민경 생글기자 (분당대진고 2년)
김민경 생글기자 (분당대진고 2년)
새해에 학생들은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는다. 액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세뱃돈을 손에 쥐고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이 중 꼬박꼬박 은행에 돈을 저축하는 학생은 얼마나 될까?

나는 어릴 적부터 돈이 모이면 은행에 저금을 하곤 했다. 첫 시작은 물론 부모님의 도장이 찍힌 통장이었다. 찰흙 인형의 사진이 인쇄된 노란색 통장이었는데, 처음으로 통장에 내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설레고 기뻤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첫 체크카드를 만들었다. 친구들이 체크카드를 쓰는 것이 부러워 만들게 되었지만 그 편리성 때문에 이제는 현금을 잘 갖고 다니지 않는다. 최근에도 은행에 다녀왔다. 주택청약, 저축성 통장, 입출금 통장 등 다양한 통장과 예금상품들에 관한 설명을 들었으나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 없어 직원분께서 추천하시는 통장을 새로 만들어 용돈을 저금했다. 소비뿐 아니라 저축도 계획을 세워 해야 하고, 둘은 사실상 같은 맥락의 일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은행은 나에게 전혀 어려운 곳이 아니었고,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곳이다.

은행은 청소년에게 계획적인 소비를 가르쳐주고 저축의 습관을 길러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저축하는 습관과 계획적인 소비를 하는 습관은 장점이 많다. 통장에 돈이 쌓여가는 것을 보면 적은 돈이지만 뿌듯하고, 계획적인 소비를 위해 용돈기입장도 자연스레 꼼꼼하게 작성하게 될 것이다. 체크카드 등을 사용하며 자신의 소비습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진짜 필요할 때, 그리고 진짜 필요한 곳에 돈을 사용할 수 있다.

주변의 친구 중에는 은행을 자연스럽게 방문하는 친구도, 은행에 가는 것을 불편해하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이미 은행에서 저축의 습관을 배운 친구라면 앞으로 은행에서 더욱 많은 도움을 받고 더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다.

김민경 생글기자 ssacoz@naver.com

기본소득제도, 도입되어야 하는가?

김무경 생글기자 (명덕외고 3년)
김무경 생글기자 (명덕외고 3년)
몇 개월 전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결에서 보인 인공지능의 발전 정도는 전 세계 사람들을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떨게 했다. 2016년 1월 세계경제 포럼에 따르면 향후 5년 동안 15개국에서 7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반면, 새로 생기는 일자리는 210만개에 불과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본소득제도 도입에 대한 찬반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기본소득제도란 재산이나 소득의 유무,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관계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소생활비를 지급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아프리카 남쪽의 나미비아 오미타라 지역에서 시행된 적이 있는데, 빈곤 문제가 상당히 개선되어 그 효과가 주목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스위스가 오는 6월에 기본소득제도 도입에 대한 투표를 최초로 시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취업문제가 심각한 우리나라 역시 기본소득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기본소득제도를 지지하는 입장은 이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절대적 빈곤을 철폐하고 상대적 빈곤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자유와 평등을 증진할 수 있고,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노동자의 권리 역시 지켜줄 수 있다. 또한 이 제도는 사회보장제도와 달리 심사를 통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심사기구가 운영되지 않으므로, 복지를 위한 별도의 행정기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른다. 모든 국민에게 기본 소득을 지급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데, 이를 어디서 확보하느냐가 대표적인 문제다. 또한 기본소득 지급으로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할 동기를 상실하여 일자리 감소가 가속화될 것이고 국민들이 기본 소득에 안주하여 노동의욕을 상실할 수 있어 사회적 무기력이 만연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반대 측의 주장으로 제기되고 있다. 물론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한다면 국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이 제도의 시행이 우리나라의 현재 재정과 상황에서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김무경 생글기자 natalie3053@naver.com

내가 수학을 배우는 이유

최재석 생글기자 (용인외대부고 1년)
최재석 생글기자 (용인외대부고 1년)
수학을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이라면, 혹은 학생이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의문을 가질 만한 질문이다. 나 역시 과거 초등학생 저학년 시절부터 수학 공부가 하기 싫어 이런 생각을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 수학을 배우는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히 수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왜’ 배우는지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 따른 ‘어떻게’, ‘무엇’에 대한 개념 역시 명확히 잡지 못했다. 그 결과 수학점수 편차도 심했고 수학에 대한 ‘반항심’만 커져갔다.

수학을 왜 배우는 걸까. 당연히 여러 번, 아니, 어쩌면 수십 번 고민해보았다. 그 답을 얻기 위해 갖가지 노력도 해보았다. 수학 경시대회 준비도 해보고, 수학 잡지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그 근본적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하나’에 대한 답을 알아가게 된 계기는 어쩌면 굉장히 소박하다. 그날도 어김없이 수학문제들을 풀고 있었다. 꽤나 어려운,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는데 그 문제가 요구하는 응용적 원리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어 쉽게 문제를 풀기 힘겨웠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 배운 원리들을 곱씹으며 여러 풀이방법을 시도해보았다. 예로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여 푸는 문제를 닮음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풀어보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수학은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수학은 우리의 논리적 흐름과 사고력을 길러주고 합리적 사고, 응용적 사고를 키워 줄 수 있는 말 그대로 ‘학문적 성격’의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배웠던 그 많은 원리들 중에 어떤 원리를 적절히 활용하고 계산·적용시킬 것인지 탐구하고, 명확한 ‘그’ 답을 도출하는 것. 현재 내게 수학은 더 이상 ‘계산’의 학문이 아니다. 이제 나에게 수학은 ‘논리’의 학문이 되었고, 수학에 대한 흥미와 열정은 비교가 되지 않게 뛰었다.

미래에도 ‘수학’과 ‘나’의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최재석 생글기자 jaeseok101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