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38도선을 알리는 표지석. 휴전선이 38선보다 좀 더 북쪽에 설정된 강원도 쪽에 가면 38선 표지석들을 볼 수 있다.
북위 38도선을 알리는 표지석. 휴전선이 38선보다 좀 더 북쪽에 설정된 강원도 쪽에 가면 38선 표지석들을 볼 수 있다.
38선과 휴전선은 다르다

38선과 휴전선은 다릅니다. 38선은 말 그대로 지도에 그려진 북위 38도선이지요. 6·25전쟁 전까지 한반도는 38선에 의해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개성은 남한이었고 설악산은 북한이었습니다. 휴전선은 6·25전쟁 때 휴전 협정이 맺어지던 그 순간의 전선(戰線)을 말합니다. 지금 남한과 북한을 나누는 경계선은 휴전선입니다.

한반도의 허리 38선에 철조망을 쳐놓고 소련은 북한에서 무슨 일을 벌였을까요? 소련은 북한에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정권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북한을 ‘북괴’라 불렀습니다. ‘북괴’는 ‘북한 괴뢰’의 줄임말입니다. ‘괴뢰(傀儡)’는 줄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뜻하는 한자어이지요. 소련은 북한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자신들의 뜻대로 조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했던 미국은 3년이 지나 우리 민족이 나라를 세웠을 때 모든 권한을 우리 정부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은 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들은 점령군이 아님을 늘 강조하였지요. 1945년 8월26일에 평양의 미림 비행장에 도착한 소련군 총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도 다음과 같은 약속으로 첫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우리는 정복군으로서가 아니라 해방군으로서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질서를 당신들께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련은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 질서에 따르는 체제를 북한에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30년이 넘도록 북한의 뒤에서 그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했습니다.

소련은 겉으로는 미국과 공동위원회를 열어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세우는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하지만 뒤에서는 북한에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일을 서두르고 있었지요. 소련은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북한에 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공산당을 구성하는 일은 소련이 내세운 김일성이 주도했습니다. 그때 남한에는 이미 조선공산당(나중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조직을 바꿈)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에는 한 나라에 하나의 공산당만을 두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공산당을 이끌던 박헌영이 크게 반발했지요. 하지만 소련군은 박헌영을 설득하여 동의를 얻었습니다.

1945년 10월14일 소련군 사령부는 평양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 시민대회’를 성대하게 열어 김일성을 북한 주민에게 소개했습니다. 진짜 ‘김일성 장군’은 북한 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독립 투사였지요. 나이가 든 진짜 김일성 장군이 나타날 것을 기대했던 북한 주민은 젊은 김일성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서른세 살의 김일성은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곧 ‘위대한 수령’ ‘민족의 태양’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소련 물러가라” 신의주 의거
북한이 1946년 지은 강원 철원군의 노동당사. 철원은 38선 이북 지역으로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북한땅이었다.
북한이 1946년 지은 강원 철원군의 노동당사. 철원은 38선 이북 지역으로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북한땅이었다.
소련은 북한을 해방시킨다고 해놓고 더 심한 속박의 굴레를 씌웠습니다. 그 사실을 북한 주민이 알기까지는 채 100일도 걸리지 않았지요. 해방된 지 100일 되던 1945년 11월23일에 기어이 그 불만이 바깥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평안북도 신의주의 학생 3500여명이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은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의 억압적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반 주민들도 함께 나섰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쏘았지요. 이날 학생 20여명이 사망하였고 1000여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신의주 학생 의거’라고 합니다.

소련은 이렇게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학살까지 하면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일을 서둘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계속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1945년 12월 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외무부 장관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결정되었습니다.

소련, 북한 공산당 단독정부 세워

“한국에 임시 정부를 만들고 새로 만든 이 정부와 협의하여 미·영·중·소 4국이 최대 5년 동안 신탁 통치를 한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를 구성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임시 정부는 남북한의 통일된 정부입니다. 그런데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인 1946년 2월8일에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일성을 위원장에 앉혔습니다. 정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북한만의 단독 정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임시 위원회는 북한을 공산화하는 일을 거침없이 진행했습니다. 1946년 3월부터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그 해 말에는 90% 이상의 공업 시설을 나라 재산으로 몰수했습니다. 그 무렵 북한에는 공산주의 체제를 더 이상 반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반대하던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했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혹은 남한으로 도망쳐 왔기 때문입니다. 1947년 초 평양에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조직됐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이 조직도 정부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고 집행 기관이라 불리는 이 위원회에서는 인민군을 창설하고 계획 경제를 시행하는 등 정부가 하는 일을 도맡아 했지요. 결국 소련은, 남한에 대한민국이 세워지기 훨씬 전에 북한에 공산주의 체제를 세우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