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39)

(35)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36)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다
(37) 제국을 선포하다
(38) 일제에 외교권을 뺏기다
(40) 3·1 운동, 겨레의 독립 만세 운동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 도착한 초대 통감이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옮기는 순간, 세 발의 총탄이 발사됩니다. 곧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지고 저격한 인물은 러시아군에 체포되는 순간까지도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칩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입니다. 1910년 2월 뤼순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당당히 말합니다. “고종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으며 국권을 빼앗아 간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처단한 것이다. 따라서 형사범이 아닌 만국공법상의 전쟁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지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던 안중근 의사

황해도 해주 출신인 안중근 의사는 부친이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한 터에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가 높았습니다. 한때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신부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최우선 방법은 교육이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 직접 민중 계몽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1907년 일제에 진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에도 헌신하여 자신의 재산을 대부분 헌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파견한 헤이그 특사를 계기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각서에 따라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 해산당하자,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항일 전쟁을 결심합니다.

1907년, 우선 북간도로 망명하였으며 그 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청년회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먼저 독립운동을 하던 이범윤 등과 만나 1908년 항일 부대를 조직하고 참모중장을 맡아 이끌게 됩니다. 그의 목표는 국내 진공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 6월과 7월, 함경도 일대에서 실제 일본군 수비대와 맞붙게 됩니다. 훗날 봉오동전투를 이끄는 홍범도의 부대와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며 일본군을 수차례 격파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때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사로잡힌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인 만국공법에 따라 그대로 돌려보낸 것이지요.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이지만 분명 국제법상의 포로에 대한 지위를 그대로 준수한 것입니다. 비록 훗날 오히려 이 풀려난 일본군에 의해 안중근 부대의 위치가 노출되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그의 뜻은 분명하였습니다. 이 대목을 이해한다면, 1910년 2월 뤼순 법정에서 안중근 의사가 자신을 전쟁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한 것도 당연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결국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도 명백히 일본인 것입니다.
[한국사 공부] 진정한 동양 평화를 위하여
국제법상 일본군 포로의 지위 인정해 준 안중근

그 후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 부대를 다시 조직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1909년 초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었으며 9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곧 뜻을 함께하는 우덕순 등과 같은 의사들을 모아 그를 처단하기 위한 두 가지 작전을 계획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정차하는 두 곳인 만주 길림성 채가구와 하얼빈에 각각 준비를 하고 그가 내리면 처단을 실행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기차가 채가구를 지나가게 되면서 이제 남은 방법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역 거사뿐이었습니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 도착하여 러시아 재무대신과 30분 동안 회담을 나눈 후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지요. 그때 의장대 후방에 있던 안중근 의사가 뛰어 나와 M1900형 브라우닝 권총으로 세 발을 발사합니다. 곧 이토 히로부미에게 명중되었고 열차 안에서 응급처치를 받지만 그는 사망합니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

[한국사 공부] 진정한 동양 평화를 위하여
그 후 안중근 의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 검찰관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부터, 그리고 뤼순 재판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을 때까지 시종일관 본인의 행동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독립 전쟁의 일환이라고 논리정연하게 주장하였지요. 그리고 국제법상의 전쟁 포로로 대우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요식행위인 재판을 할 뿐이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되는데 그는 더 이상의 공소를 포기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동양평화론』을 죽음 직전까지 저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일제의 침략을 감춘 허울뿐인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을 비판하고 그를 처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한 선택임을 세상에 남겨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이 저술이 완성되기 전에 일제는 이마저도 두려워 먼저 사형을 집행합니다.

1910년 3월26일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다만 오늘날 그 일부는 남아 있어 그의 동양평화론의 구체적 내용을 조금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동양 평화 회의체’를 구성하여 정치적 평화를 유지하고 공동 은행과 공용 화폐를 발행하여 경제적 공동 발전까지 구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미완성으로 그리고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도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지요. 그 몫은 이제 우리와 미래 세대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고 여깁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