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생글생글 492호 2015년 11월 16일

한국사 공부

[한국사 공부]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5년 11월18일 새벽 2시, 경운궁 수옥헌(덕수궁 중명전)에는 다섯 명의 대한제국 고위 관료들이 모입니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와 외부대신 박제순이 대표로 이토 히로부미가 제시한 조약을 체결합니다. 바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을사늑약입니다.

러일 전쟁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노림수

이미 11월9일부터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자신들의 침략을 숨긴 ‘동양평화’라는 허울뿐인 명분을 들고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에게 보호국이 될 것을 인정하는 조약 체결을 강요합니다. 외교권을 박탈한 후 한반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지요. 고종과 당시 조정 대신들은 당연히 거부합니다. 그러자 일본공사는 물론 무장한 일본군까지 궁궐 안으로 진입시키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토는 하세가와 주한일본군 사령관과 함께 고종을 세 번 찾아가 계속해서 압박을 가합니다. 고종 황제는 계속 거부했고 대한제국의 어전회의에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 강했습니다. 결국 이토는 헌병까지 동원해 강제적으로 회의를 열게 하고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에게 강제적이고 불법적인 조약 체결에 관한 찬반을 묻게 됩니다. 11월17일,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강하게 반대했고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합니다. 결국 맨 처음 언급한 다섯 명의 대신들이 찬성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18일 새벽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흔히 역사는 인과 관계 또는 흐름을 중시합니다. 전후 맥락 속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지요. 시계를 20년 전인 1885년으로 돌려볼까 합니다. 그해는 갑신정변이 실패한 다음 해였고, 유길준이 한반도 영세 중립화론을 제안한 해이기도 합니다. 중립화론을 선택해 한반도를 열강의 침략 대상이 아닌 정치적 중립 지대이자 완충지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점진적 방식으로라도 부국강병과 주권을 지킬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요. 1897년에 가서야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 선포가 있었고, 지난 호에 보듯 시간도 부족했고 외세가 쉽게 넘보지 못하도록 강한 국가로 변한 것도 아니었지요. 만시지탄. 결국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이 땅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그 직전 고종 황제의 국외 중립 선언이 있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 선언과 상관없이 양국은 전쟁에 돌입합니다.

문제 투성이 불법 조약인 을사늑약

일제는 전쟁 중에 집요하게 하나씩 조약을 강요합니다. 먼저 1904년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한반도의 군사적 요충지를 수시로 사용할 수 있었고,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동의하면서 반대급부로 한반도의 독점적 지배를 승인받습니다. 제2차 영·일동맹에서도, 그리고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은 국제적으로 한반도의 독점적 지배, 즉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보장받게 됩니다. 그 후 일본 도쿄 외무성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감리·지휘하며(제1조) 한국 정부는 일본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그 어떤 국제적 조약도 맺지 못하도록 하는(제2조) 을사늑약을 체결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을사늑약은 명백한 불법입니다. 기본적으로 일본군이 황궁을 침범하였고 제국의 황제를 위협했으니까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 황제는 조약에 도장을 찍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시 대표였던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고종 황제가 위임장을 준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을사 5적 중 권중현조차 당시 조약이 정식 절차에 따른 것도 아니고 황제의 재가를 거치지도 않았으므로 조약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지적할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조약의 명칭조차도 없습니다. 불법에다가 문제 투성이 조약이 을사늑약입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국제법 학자인 프란시스 레이도 무효라고 했으며, 1935년 하버드 법대 보고서에서 효력이 발생할 수 없는 대표적 조약으로 을사늑약을 들고 있지요.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

물론 나라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일차적인 책임은 그렇게까지 위기를 가져오도록 한 집권자의 몫입니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종 황제는 그 이후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하려 합니다. 체결 4일 뒤 미국에 있던 황실고문 헐버트에게 이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미국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통보합니다. 또한 대한제국과 수교를 맺은 모든 당사국들에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일을 헐버트에게 요청합니다. 또한 당시 국제분쟁을 처리하던 헤이그 만국공판소에 제소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 노력의 일환이 바로 1907년에 파견한 헤이그 특사입니다. 이준, 이위종, 이상설로 구성된 헤이그 특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일제의 침략을 호소하려 했습니다. 국권 회복을 위한 이 외교적 노력은 안타깝게도 회의 참석이 거부되면서 좌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사 일행은 계속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일제는 이를 알고 곧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는 일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일제는 우리 민족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수순을 밟아가게 됩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온라인신문협회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