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선 한국호,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4) 정주영과 국가

"기업과 나라는 공존·공영 관계"
소양강댐 공사, 현장의 자재 활용
정부안보다 30%가량 절감
지난달 16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1도크.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에 오르니 조선소 대형 블록공장 외벽에 써 있는 커다란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 글자판 하나의 크기가 가로·세로 2m를 넘는 36자(字) 문구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호 아산·峨山)의 기업관이 온전히 담겨 있다.

아산은 울산조선소 완공 2년 뒤인 1976년 국가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이 문구를 조선소에 내걸었다. 임직원과 공유하려는 취지에서였다. 현대중공업 부사장을 지낸 도영회 전 현대인력개발원장은 “기업과 나라가 서로 공존·공영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아산의 경영철학”이라고 말했다. 이 문구는 울산조선소 5곳을 포함해 삼호중공업, 미포조선소, 군산조선소 등 총 17곳에 붙어 있다.
아산이 1984년 2월 충남 서산 간척사업 현장에서 공사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현대건설 제공
아산이 1984년 2월 충남 서산 간척사업 현장에서 공사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현대건설 제공
아산은 기업 활동을 하면서 수익 확보뿐 아니라 국익을 함께 고려했다.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강댐 등 건설 과정에서 공사비를 혁신적으로 줄인 배경이다. 당시로서는 낯선 ‘대안 입찰’이라는 카드를 꺼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아산은 “나라가 부자건 가난하건 국가 시설은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지어야 한다”며 “돈만 벌려고 고의로 세금을 낭비하는 기업가는 건설업을 할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현장 자재로 세금 아낀 소양강댐

1967년 강원 춘천시 소양강댐 건설을 맡은 현대건설과 발주처인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및 한국수자원개발공사(현 한국수자원공사), 댐 설계를 맡은 일본공영이 참석한 회의에서 아산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하시모토 도시오 일본공영 부사장은 ‘주변에 널린 흙과 모래, 자갈을 활용해 소양강댐을 사력(沙礫)댐으로 짓자’는 아산에게 “어디서 댐 공부를 했나. 무식한 소리 하지 마라”며 면박을 줬다. 심지어 학력까지 거론했다고 한다.

소양강댐은 일본공영이 설계한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건설부 승인까지 받았지만 아산이 예산 절감 차원에서 대안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아산은 “한국은 제철소가 없어 철근도 수입해야 하고, 시멘트도 부족한데 소양강댐을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건설하면 설계비부터 각종 자재비까지 일본만 좋은 일을 시킨다”며 사력댐 주장을 꺾지 않았다. 권기태 전 현대건설 부사장은 “현장 자재를 활용하는 사력댐은 콘크리트 중력댐보다 공사비를 30%가량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서 사력댐 건설로 방향이 틀어졌다. 당시 박 대통령은 콘크리트 댐은 북한이 댐을 폭격하면 통째로 깨질 수 있지만 모래와 자갈로 된 사력댐은 폭격 시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 사력댐을 옹호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양강댐은 6년6개월간의 공사 끝에 1973년 10월15일 국내 첫 사력댐으로 준공됐다. 준공 당시 동양 최대 댐이었던 소양강댐은 40여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안전 문제 없이 지금도 수도권 용수의 절반 가까이를 공급하고 있다.
아산이 1976년 현대중공업 조선소 외벽에 내건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될 수 있는 길이고,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 문구.
아산이 1976년 현대중공업 조선소 외벽에 내건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될 수 있는 길이고,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 문구.
정부도 포기한 올림픽 유치

1988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도 투철한 국가관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를 앞두고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아산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을 떠맡았다. 분위기는 회의적이었다. 김택수 IOC 위원은 “서울은 3표밖에 안 나온다. 한 표는 우리 거고, 다른 한 표는 미국, 마지막 한 표는 대만 거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산은 현대를 비롯한 한국 주요 기업 대표들이 ‘반드시 유치한다’는 마음으로 뛰면 유치를 못할 것도 없다고 확신했다. 아산은 바덴바덴 총회에서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고무줄로 묶은 명함 뭉치를 들고 IOC 위원을 만나러 시내를 돌아다녔다. 중동과 아프리카 IOC 위원들을 만나서는 “당신들도 언젠가 올림픽을 치를 텐데,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도 올림픽을 치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좋은 기회”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매일 18시간씩 강행군을 펼친 아산과 유치단의 노력 속에 일본 나고야 대세론은 점차 힘을 잃었고 서울은 전체 82표 중 과반인 52표를 얻어 27표에 그친 나고야를 누르고 88 올림픽 서울 유치에 성공했다.

“국가는 국민과 후손들의 것”

대안 공사를 제안해 세금을 아끼고, 모두가 안 된다고 하던 올림픽 유치에 앞장선 아산의 행동은 권력에 잘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 살고, 일하고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내 나라를 위해서였다. 정부가, 사람이, 권력이,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조국은 언제나 우리들의 것이며 우리 후손들의 것이다. 조국은 날마다 발전, 번영하면서 영원해야 한다.” 아산이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남긴 말이다.

아산은 소양강댐과 같이 민간 기업이 예산을 절감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을 때 이를 적용할 수 있는 대안 입찰의 유용성을 줄기차게 주장해 1977년 정부가 제도를 도입하도록 했다. 김광명 전 현대중공업 사장은 “아산은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전에 돌입하면서 ‘달러가 없어 나라가 부도나게 생겼으니 적자가 나더라도 반드시 공사를 따야 한다’고 수주를 독려했다”고 말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대금은 9억3000만달러로 당시 한국 외환보유액 29억6000만달러의 30%를 웃돌았고 오일쇼크를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88 서울올림픽 개최 준비 과정에서도 아산은 사익을 미루고 공익을 앞세웠다. 아산이 대한체육회장을 맡고 있던 1983년 올림픽선수촌 건설을 민간사업으로 할 것이냐, 서울시 주도의 공공사업으로 할 것이냐 논의가 분분했다. 아산은 “수익이 불안할 때는 민간사업으로 하고, 수익이 분명할 때는 공공사업으로 하는 게 낫다”며 “올림픽선수촌은 분양 성공이 확실한 만큼 공공개발로 하자”고 제안했다. 현대건설을 갖고 있는 아산이 민간개발로 돈을 벌려고 할 것이라는 주위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공공개발로 5500여가구에 달하는 아파트를 지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선수기자촌’은 민간 분양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2000억원 이상의 수익을 냈다.

한경·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 공동기획

울산=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