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28)

(26) 서원과 향약의 나라 조선
(27) 이순신, 일본군의 기세를 꺾다
(29)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30)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경기 남양주에 위치한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무덤
경기 남양주에 위치한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무덤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다시 일으키고 실용적 외교노선으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군주인가, 아니면 인륜을 어기고 무리한 토목공사로 나라를 망친 폭군인가. 조선의 역대 왕 중 오늘날까지 가장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왕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정반대의 민낯을 역사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한국사를 단지 위인전의 나열이 아니라 생각하고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그는 조선 제15대 왕이자 연산군과 함께 ‘군’으로 역사에 영원히 남은, 광해군입니다.

위대한 군주인가 패륜적 폭군인가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후궁의 자식이라 사실 조선의 예법을 엄밀히 적용하면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위 형인 임해군이 있었고,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왕비(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이 적자로 존재했기 때문이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서자인 광해군이 왕이 되기에 무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임진왜란 때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조정을 이끌던 왕세자였습니다. 이른바 ‘분조’ 활동이라 하여 의주와 평양에 있었던 선조를 대신해 조정을 쪼개 전쟁 상황에서 국가를 이끄는 것이지요. 전국을 돌며 광해군은 민심을 달래고 군량을 모았으며, 한편으론 의병활동을 펼치던 유생들과 뜻을 함께하게 됩니다. 이때 남명 조식의 제자이던 정인홍 등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데, 훗날 이들이 곧 북인 집권 세력이 됩니다. 이렇게 전쟁 속에서 국가를 이끈 경험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나름대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

특히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 중기 이후 문제가 되었던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대동법을 시행하게 됩니다. 대동법은 공물로 내는 특산물을 쌀로 내는 것입니다. 비록 경기도에서만 시범적으로 시행하였지만 당시 농민들이 가장 힘겨워하던 공납을 전세화하면서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줄여줍니다. 또한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며, 전란을 거치며 불타버린 여러 서적을 재간행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외교가 재개되면서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통신사를 파견합니다.
경희궁 숭정전
경희궁 숭정전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중립외교인가
배은망덕한 외교술일 뿐인가


무엇보다 광해군이 재평가받는 정책은 그의 외교전략입니다. 이른바 ‘중립외교’라고 불리는 이 정책은 당시 국력이 쇠퇴해가던 명과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조선의 안위를 지키는 외교 노선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간단치 않았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내주었는데 이번에는 반대급부로 조선이 명을 도와 후금을 치는 전쟁에 함께하기를 원한 것이지요. 사실 이를 외면할 명분은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 상황이 전란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전쟁을 하거나 혹여 후금이 우리나라로 전격적으로 침략하면 물리치기 버거운 상황이기에 매우 부담이 된 것이지요.

허준의 동의보감
허준의 동의보감
1619년 명과 후금의 심하 전투에서 광해군은 강홍립을 중심으로 한 대명지원군 1만3000명을 파견합니다. 이때 광해군은 비밀리에 강홍립을 불러 상황을 잘 파악하여 판단할 것을 명합니다.

강홍립은 명이 전투에서 밀리자 전투에 직접 개입하여 명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후금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는 명을 도와준 명분을 세우면서도 한편에서는 후금을 자극하지 않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나 명은 조선이 일부러 항복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으며, 조선 내부에서도 특히 서인을 중심으로 이 중립외교에 반발하게 됩니다. 조선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1614년 8살밖에 되지 않은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1618년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이른바 ‘폐모살제’까지 더하여 광해군은 성리학적 가치에 반하는 반인륜적 행위와 정책을 펼치는 폭군으로 몰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역사적 과제를 던지는 광해군

[한국사 공부] 광해군의 두 얼굴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무너집니다. 그는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나중에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641년 세상을 떠납니다. 광해군은 결국 묘호를 갖지 못했으며, 영원히 ‘군’으로 남았습니다. 재위 15년, 그의 정책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이 배은망덕해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었듯, 그의 외교 정책은 실패한 것이며 그가 경덕궁(경희궁)을 새로 짓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조선을 일으키기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권력을 드높이는 일에만 전념했다는 평가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거울 삼아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나아갈 해법을 제시했으며, 광해군의 개혁정책과 민생 안정책은 당시에도 매우 유효했다고 보는 긍정적 평가가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몇 차례 등장하며 광해군을 다시 보려는 시각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했지요.

여러분에게 광해군은, 그리고 그의 중립외교를 비롯한 각종 정책은 어떻게 보이나요? 한국사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시각을 갖는 것, 그리고 현재에도 유효한 역사적 교훈을 찾아보는 것, 그것이 오늘날 광해군이 우리에게 던진 역사적 과제는 아닐까요?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