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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479호 2015년 7월 13일

Book & Movie

[Book & Movie] "인간 존엄의 무덤…전체주의 고발한 예언적 소설"


1970년대 후반이었다. ‘1984’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때가. 최루탄 냄새가 가득한 대학가 하숙촌에서 마치 숨겨진 암호문을 해독하는 그런 기분으로 이 책을 몇 번이고 거듭 읽었었다. 독재의 그림자가 걷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먼지를 털고 다시 이 책을 꺼내 읽은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91년 가을 구(舊)소련 특파원으로 모스크바행 준비를 서두르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그날 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한때 세계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정신적 조국이 바로 소련이었다.

공산주의라는 헛된 망상

물론 극소수의 비판자도 있었다. 전체주의적 세계가 만들어낼 미증유의 파국을 예언하고 경계하는 초월적 지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극소수의 지성인이었다. 미제스, 하이에크 등 자유의 본질을 꿰뚫고 있던 자들만이 사회주의적 이상이 만들어낼 전체주의 지옥도를 겨우 알아챘을 뿐이었다. 미제스는 특히 ‘공산주의는 결코 자유시장경제가 만들어내는 수요공급을 계산해낼 수 없다’는 불멸의 법칙을 선언했다. 일견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자유만이 진정한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라고 불렀다.

그러나 대부분 지식인들은 낡은 봉건적 혹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끊어내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구소련에 대해 찬미와 찬사를 오롯이 바쳤다. 그들은 공산주의야말로 인간의 탐욕을 억제하고 질서정연한 평등사회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순수한, 그러나 헛된 망상에 빠져들었다. 그런 오류에 가득찬 시간은 20세기 거의 절반을 관통했다. 그리고 1970년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 이제 공산주의 체제는 역사적 소명을 끝내고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공산주의적 열풍은 결코 중단된 적이 없었다.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소련을 방문하고 찬양과 존경을 보냈다. 사회주의가 공식적으로 문을 닫기 불과 일보 직전에도 새뮤얼슨 등 저명한 경제학자조차 소련의 번영이 지속될 것이라는 흰소리를 뱉었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저항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윈스턴 스미스는 차가운 바람을 피해 턱을 가슴에 처박고 승리맨션의 유리문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막을 새도 없이 모래바람이 그 뒤를 따라 들이닥쳤다. 복도에서는 양배추 삶는 냄새와 낡은 매트 냄새가 풍겼다. 복도 한쪽 끝 벽에 컬러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실내에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큰 것이었다. 포스터에는 폭이 1미터도 넘는 커다란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1984’는 우리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등장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국민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 나라는 오세아니아다. 세계는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3개 연맹국가로 분할되어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작은 전쟁을 되풀이 한다. 오세아니아는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국가다. 빅브라더는 어버이처럼 국민들을 보살핀다. 자애로우며 손길은 너무도 다정스러워 국민들은 언제나 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산다.

“엘리베이터는 있으나마나한 것으로 경기가 좋을 때도 좀처럼 가동되지 않는다. 그런 터에 지금은 한낮이라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증오주간에 대비한 절약운동 탓이었다. 윈스턴의 방은 7층이었다. 서른아홉의 그는 도중에 몇차례나 쉬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층계참을 지날 때마다 엘리베이터 맞은 편벽에 붙은 커다란 얼굴의 포스터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 얼굴 아래 빅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정부는 보도연예교육예술을 관장하는 진리부,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 경제문제를 책임지는 풍요부로 구성되어 있다. 진리부가 하는 일은 지나간 기록물들을 지금의 시각에 맞게 재편집하는 일이다. 과거는 삭제되고 오늘의 관점에서 새로운 사실들도 채워지며 다시 발행된다. 문서, 신문, 사진, 녹음, 영화 등 과거의 모든 기록을 조작하고 바꾸는 것이다. 당은 또 나쁘다(bad)를 좋지 않다(not good)로 교체하는 등 언어 순화작업도 실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민들을 파고드는 이단적이며 사악한 생각을 사전에 차단하고 하나의 아름다운 사상으로 무장해 사회의 충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윈스턴은 결국 저항을 시도하게 된다. 사랑하는 줄리아를 만나고 내부당원인 오브라이언을 찾아 반당지하단체인 형제단에도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지하경찰에 체포된다. 감옥에 갇힌 윈스턴 스미스는 오브라이언이 바로 사상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는다. 결국 윈스턴은 모진 고문과 세뇌를 받은 끝에 줄리아를 배반하게 되고 당과 국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일말의 저항도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빅브라더를 사랑하는 국민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해주기를 간청한다. 윈스턴 스미스는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가장 기만적인 단어 ‘평등’

위대한 작가란 오웰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소설에서 시작해 ‘동물농장’을 거쳐 ‘1984’로 작가적 삶을 완성해갔다. 처절한 비극의 장정이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인민주의적, 공화적, 무정부주의적 평화, 평등, 우정의 세상을 꿈꾸고자 했던 작가 자신의 열정과 현실 정치에서의 실망을 증언한 작품이었다. 카탈로니아의 찬가였는지, 카탈로니아의 비극이며 저주였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한때의 열정이 차디찬 현실정치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과정이 작가 자신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거쳐 ‘동물농장’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공산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폭압적, 위선적 정치체제라는 그림이 보다 분명히 드러났다. 그것은 명백한 정치풍자였고 소련 스탈린주의를 향한 고발이었다.

누구나 한때는 분별없는 사회주의적 열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은 전혀 다른 노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야말로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협력하도록 만드는 가장 냉정한 체제라는 것을 알아채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드러난 정치적 목표만으로도, 그리고 벽보에 내걸린 구호만으로도 선(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윈스턴 스미스가 살아가는 사회처럼 말이다.

일부에서는 ‘1984’를 현대판 감시사회라고 말한다. CCTV나 컴퓨터에 의해 전방위적 그리고 판 옵티콘적 감시를 받는 사회의 도래를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웃기는 수박겉핥기식 주장들이다. 1984년은 전체주의적 정치열정이 만들어내는 참혹한 결과에 관한 놀라운 예지이며 전체주의적 사회가 만들어내는 폭력적 정치공학을 경고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모든 사회주의적 열정에 대한 경고다. 냉정한 개인주의 아닌 그 어떤 인간애적 평등주의도 결국에는 ‘1984’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을 미리 증언해놓은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그 가능성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북한은 그 살아있는 증거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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