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 그리스 몰락…운명은 34년전 결정됐다
[Cover Story] '타락한 민주주의' 그리스…주인과 대리인의 공모 파탄의 길로…
그리스 국민들이 그리스 구조조정안에 반대했다. 긴축안 반대표가 60%를 넘었다. 국가부채가 우리나라의 한 해 예산보다 많은 400조원에 달하는데도 그리스 국민은 ‘마이 웨이’를 외치고 있다. 그리스 경제가 망하기까지 나타난 과정은 타락한 민주주의의 전형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주의는 장점이 많지만 단점도 적지 않다. 인류문명이 고안한 최고의 체제이긴 하지만 천민민주주의와 타락한 민주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다수표로 의사가 결정되는 민주주의는 그리스의 경우처럼 타락의 길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인과 유권자의 공모

여기서 잠시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라는 학자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는 민주주의의 약점을 지적한 자유주의 진영의 학자다. 그의 저서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Democracy: The God That Failed)’은 군주제와 민주제를 비교하면서 민주주의의 약점을 지적한다. 물론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가 최고의 제도라고 여기고 있는 민주주의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호페는 민주주의가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을 크게 두 가지로 봤다. 하나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이다. ‘마을의 공동 목초지는 빨리 황폐화된다’는 이 원리는 결국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없다는 말과 같지 않으냐고 호페는 주장한다. 주권자들은 선거 때마다 투표권을 행사해 민주적 대표자, 즉 대리인을 뽑으면 그만이고 주인으로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우려한대로, 선거에서 당선된 대리인들은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보이기 쉽다. 귀중한 재화를 알뜰하게 운영하기보다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낭비하기 쉽다. 대리인들은 또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인기 영합적정책을 마구 수립하고, 예산을 함부로 늘리고, 권한을 확대하려 한다. 유권자들은 사회 공동의 선보다는 집단 이익이나 지역 이익에 따라 표를 던지기 쉽다.

복지 등 입법과잉의 문제

호페는 민주정의 입법 과잉도 우려한다. 다른 어떤 정치체제보다 민주제 하에서 입법행위가 무분별하게 남발할 수 있다는게 호폐의 지적이다. 이는 대리인 즉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지역이나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특별한 법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입법 과잉 현상은 민주제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호폐는 비판한다. 실제 이러한 현상은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면한 현안이기도 하다. 그리스 역시 지난 수십년간 공짜복지, 연금증액, 공무원 확대 등 온갖 법률을 만들었다. 법은 만들면 반드시 지켜져야 하되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칸트로 이어지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법의 일반성, 탈목적성, 추상성을 강조한다. 특정집단, 특정세력을 위한 법은 일반성 추상성이 없는 ‘특혜입법’으로 법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이 되려면 흄과 애덤 스미스는 정의의 규칙(타인의 인격, 신체, 재산의 존중과 계약 엄수)에 부합해야하고, 칸트는 정언명령(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취급해야 한다)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호페는 민주주의의 피선거권 제도에도 의문을 던졌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므로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따금 “저런 사람이 의원이라니”라며 혀를 찰 때도 있다. 특정 정당 또는 특정 지역 출신이라면 무조건 찍어주는 민주정의 선거 관행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수준높은 유권자

하지만 호페의 지적을 보면 그리스를 비롯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포퓰리즘 과잉입법 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호페는 민주주의를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 각자가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보다 공동선을 먼저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토크빌의 지적처럼 민주정의 국민들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와 대리인을 갖게 된다. 성숙한 민주주의론은 그래서 나온다. 자기삶을 자기가 책임지는 개인이 많을 때 숙의민주주의는 가능하다. 그리스 국민들이 허리띠 졸라매기에 반대하고 나선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각자의 이익을 찾는 국민들은 그리스 경제를 위해 제대로 투표한 것인지를 민주주의 국가들은 지켜보게 된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