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디아블로 3 소장판’ 출시 날, 서울 왕십리 행사장에는 5000여명의 인파가 몰렸다. 준비 수량은 2000개에 불과했지만 게이머들이 한정판 게임 CD를 손에 넣기 위해 밤새 비를 맞고 줄을 섰다. 결국 제품을 구하지 못한 3000여명은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이들이 밤새워 한정판을 기다린 이유는 무엇일까. 한정판에만 있는 ‘천사의 날개’라는 아이템이 답이다. 이는 게임 케릭터의 능력을 강력하게 하지는 않지만 게임 중 남과 다르게 보이는 장식 아이템이다. 남들과 똑같은 공산품으로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한정판’에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명품시장 등에서 많이 활용해온 이 마케팅 기법은 최근 도서 문구 콜라 음료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무늬만 한정판인 사례도 있어 한정판의 남발이 우려된다.

한정판 마케팅은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제품을 소수만 만들어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남과 다르다’는 소비자의 우월감을 겨냥한 영업 기법으로 지금이 아니면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게 된다. 스포츠업계와 명품시장 등에서 흔히 사용돼온 이 마케팅 기업은 최근 문구 게임 식품업계 도서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모나미 153 리미티드 1.0 블랙’이다. 모나미는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몸체를 플라스틱 대신 황동으로 입힌 볼펜 1만개를 만들었다. 이 제품이 나오자 하루 만에 매진됐고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한정판 재생산’을 요청하는 서명운동까지 벌어졌다. 또 소치동계올림픽 기념으로 코카콜라가 올림픽 한정판 음료를 출시했고, 로만손시계는 ‘김연아 비바 탱고 시계’를 한정 판매한다.

도서에서 한정판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고 법정 스님의 저서가 있다. 2010년 법정 스님이 입적하면서 책을 전부 절판하라고 해 소비자들은 이를 한정판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당시 출판 사상 처음으로 한 저자의 책이 베스트셀러 1~8위를 모두 휩쓸기도 했다. 그러나 법정 스님 저서는 출판사와 재단이 합의해 추가로 책을 찍기로 결정하면서 한정판 의미가 사라지자 다시 재고가 남게 됐다.

한정판 마케팅은 제품의 ‘희소성’으로 “이번 기회가 아니면 더 이상 구입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던지는 것이다. 명품시장은 제품의 희소성을 부각시켜 한정판 마케팅에 나선다. 명품브랜드 몽블랑은 역사 속 위인이나 예술가로부터 디자인을 착안해 다양한 콘셉트의 한정판을 출시했다. 그리고 한번 생산한 후에는 제작에 사용된 동판 등을 모두 폐기한다. 아예 재생산이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 전략 덕에 몽블랑 한정판을 수집하는 마니아 층이 두텁다.

최근의 한정판 신드롬은 작지만 특별함을 찾는 사람들의 ‘작은 사치’에 대한 욕구가 한정판 마케팅 열풍을 이끌고 있다. 사소한 차이라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면 지갑에서 돈을 꺼내겠다는 소비심리다. 물론 큰돈은 아니지만 자신의 지출한도 내이거나 약간 초과하는 범위에서의 사치다. 분명 명품을 찾는 소비욕구와는 구별된다. 원하는 것도 큰 차이가 아니다. 물건 자체의 특별한 의미를 다른 사람들이 인지해주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한정판에 대한 소비 욕구가 과열되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고액에 판매되기도 하고 이를 이용한 사기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모나미 한정판 제품의 경우 2만원짜리 펜이 최고 34만원까지 거래되기도 했다. 컴퓨터 게임 디아블로 3도 평균 3~4배의 가격으로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판매됐다. 또 한정판을 팔겠다며 돈만 받고 잠적하는 이들도 있다.

‘무늬만’ 한정판인 사례도 나오고 있다. 한정판이 남발되는 경우다. 한정판이라면서 수만 개를 만들어 사실상 ‘한정’의 의미를 무색하게 한다. 수입 화장품 업체 중엔 기존 인기 제품의 용량만 늘려 한정판으로 출시하기도 한다. 최근 불황으로 수입 화장품을 찾는 이들이 줄어들자 한정판 전략을 활용해 이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제품의 용량과 패키지는 그대로지만 유명 연예인의 이름을 따거나 디자인만 살짝 수정해 한정판으로 판매하는 업체들도 있다. 가격을 올리기 위한 ‘꼼수’인 셈이다. 이동훈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기존 제품과 차별성이 없거나 과다 생산하는 한정판은 장기적으로 소장 가치가 떨어진다“며 “기업들의 한정판매 마케팅에 현혹되기보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제품인지 따져보고 구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손정희 한국경제신문 연구원 jhs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