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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320호 2011년 12월 5일

기술이 국력이다

[기술이 국력이다] "카카오톡은 결정하지 않는 리더를 싫어하죠"

이공계 CEO 열전 ⑧ -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우다
# 승부사의 길
# NHN 퇴사… 카카오톡 개발

#"평생 벤처기업인 육성하겠다"
# 엄마의 손길이 그리워
#자유방임주의 교육



이공계 CEO 열전 ⑧ -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45)은 국내 인터넷 업계에서 PC 기반의 웹시대와 모바일 시대를 석권한 인물로 꼽힌다. NHN과 카카오톡 성공이 가져다 준 영광이다.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성공사례다. “검색이 인터넷 시대를 지배했다면 모바일 시대에는 커뮤니케이션이 핵심 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가 될 것으로 봤습니다.” 31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쓸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점을 일찌감치 감지한 사람이 바로 그다.


 # 엄마의 손길이 그리워

김범수의 어린 시절은 가난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자녀 교육을 위해 전남 담양을 떠난 부모님은 고달프게 서울살이를 했다. 김범수와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할머니를 포함한 여덟식구는 작은 방 한 칸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호구지책을 위해 아버지는 막노동과 목공일을 해야 했고 어머니 역시 식당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누나 둘과 소년 김범수, 동생 두 명은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단칸방 생활은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소년은 스스로 커야 했다. “집이 가난해서 이사도 엄청 자주 다녀야 했어요. 이사를 좀 다녔다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이사 횟수였어요. 이 때 가난에 대한 두려움,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부터였다. 아버지가 정육도매업을 하면서 ‘찢어지는’ 가난에서 벗어났다. 물론 부유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옛날보다 훨씬 나아졌다.

 #자유방임주의 교육

부모님은 한 번도 무엇을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냥 놔둬도 잘 알아서 하는 아들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나”라는 물음에 그는 “원칙이 그러셨던 것 같아요. 자식에게 맡겨두는 게 사실은 힘든 것이거든요. 아이를 낳고 보니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알았어요.”

이런 자율공부는 모든 계획을 스스로 짜는 힘을 길러주었다. 노는 것도 알아서 놀고 공부 계획도 알아서 세웠다. “어찌 생각해보면 신기하기까지 해요. 어떻게 그 정도로 아들을 믿고 맡겨둘 수 있었던 것일까 하고요. 자녀를 키우다 보면 자꾸 부모의 바람이 주입되기 마련이거든요.” 그는 또 “어린아이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우는데, 요즘 부모는 그걸 못 기다리죠. 정답을 알려주고 그것만 하게 해요. 서울대 교수인 동기가 하는 말이, ‘요즘 학생들은 아는 건 많지만 문제 해결 능력은 없다’고 하더군요.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아이들이 혼자 헤쳐 나가도록 기회를 줘야 합니다. 어렸을 때 저는 저도 모르게 그런 것을 배웠어요.”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우다
초등학생 때 집에 백과사전 한 질이 있었는데 혼자 있을 때마다 소년은 그걸 읽고 외웠다. 백과사전을 줄줄이 꿸 정도였다. 김범수는 백과사전 지식을 기반으로 퀴즈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게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는 걸 좋아했어요. 문제는 백과사전에서 냈지요.”

백과사전 지식과 게임. 이것이 훗날 인터넷 검색 사업과 게임사업에 뛰어들게 한 먼 동기는 아니었을까. 1990년대 후반 석학 레스터 서로우가 설파한 ‘지식의 지배’를 그는 적어도 20여년 전 초등학교 교실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간이 흘러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했던 김범수는 성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두고 그는 공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막연하게나마 공학자가 되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한 번도 강요하지 않았던 부모님이 처음으로 제동을 걸었다. 부모님은 한의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워낙 고생을 많이 한 부모님은 전문직을 원했다. 대학 도전에 실패한 그는 재수해 이듬해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 공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승부사의 길

그는 1992년 삼성SDS에 입사했다. 프로그래밍을 몰랐던 그는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공부한 것이 윈도와 C언어였다. 우연일까. 회사는 ‘C++프로그램’을 할 줄 아는 직원을 물색했고 그를 선발해 갔다. 이때부터 그는 PC통신 유니텔의 프로그램 개발부터 기획 설계 유통 관리 업무를 섭렵했다.

1998년 그는 삼성SDS에 사표를 내고 서울교대 근처 오피스텔에서 국내 최초의 게임포털 한게임을 창업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불어닥쳐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직원 10명 중 9명이 회사를 떠났다. 회사 운영이 어려워진 그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 게임을 개발해야 했다.

사채 등 2억5000만원을 동원해 PC방을 차린 이유다. 돈도 벌고 자신이 개발한 게임을 직접 테스트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당시 한양대 앞에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PC방을 차렸다. 잘못하면 쫄딱 망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PC방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때 경험으로 그는 게임 회사 경영뿐 아니라 최일선의 PC방 영업까지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때 그는 “최악의 리더는 결정하지 않는 리더”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업이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바둑, 포커 등 게임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회원이 급증했다. 한게임 콘텐트를 기반으로 김범수 사장은 2000년 인터넷 검색 업계의 선두주자 네이버와 합병했다. 한게임 4주당 네이버 1주 합병이었다. NHN은 이렇게 탄생했다. 검색과 게임의 합병은 윈-윈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다.

# NHN 퇴사… 카카오톡 개발

2007년 김 사장은 NHN을 떠났다. “성공한 NHN은 정박한 배여서 떠난다”는 퇴사의 변을 남겼다. 재미있고 도전적인 일을 찾는 것, 벤처인의 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이후 2년반 동안 그는 이것저것에 손을 댔다. 아이위랩(카카오 전신)을 설립하고 부루닷컴과 위지아라는 사이트를 만들었으나 실패했다. 돈도 제법 까먹었다.

2009년 10월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2010년 아이위랩을 카카오로 바꾸고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는 “스마트 모바일 혁명으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모바일 시대에 적합한 앱을 만드는 데 카카오의 모든 역량을 투입했다. 2010년 3월,그는 카카오톡을 내놨다. 서비스가 나오자마자 10만명이 다운로드 받는 것을 보고 다시 본능적으로 결단을 내렸다. 기존에 준비하고 있던 모든 다른 앱 개발을 중단하고 카카오톡에 올인했다. 카카오톡은 출시된 지 1년여 만인 지난 4월 1000만명을 돌파했고 이젠 3100만명이 메신저로 쓰고 있다.

그는 후배들이 사업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한국이 100명의 능력 있는 벤처기업인을 배출할 수 있도록 자금과 노하우를 지원하는 일을 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의장이 창업 자금을 지원한 ‘포도트리’가 그것. 포도트리가 지난해 출시한 영어공부 앱 ‘슈퍼 0.99’는 나오자마자 앱스토어 1위에 오르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요즘 그는 카카오톡의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엄청난 회원을 무기로 그는 또 어떤 마술을 부릴까?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김범수 의장 프로필



▶ 1966년 서울 출생

▶ 1991년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 1998년 한게임 창업

▶ 2000년 네이버와 합병

▶ 2000년 NHN 사장

▶ 2010년 카카오톡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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